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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8-23 13:13
작품평론 - 정경진 <전시가이드 8월호>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58  

정경진 작가의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된 모티브는 자연인 듯 보인다. 하지만 언뜻 보기엔 형상들이 자연물과 같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화면에서 보는 것과 같은 풍경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산수화의 색 또한 나무의 그것이 아닌 선명한 파란색이다. 작가는 나무, 물, 바위 등의 동양화의 소재와 한지, 먹 등의 동양화 고유의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산수화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탄생시킨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욕망은 수천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 오랜 과제를 남겼다. 정경진 작가의 작업은 존재하는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없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느끼는 데서 출발한다. 인식의 한계를 가진 내가 마주하는 세상은 나에게는 실존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세계가 정말로 실존하는지, 그것이 나에게 보이는 것처럼 남들에게도 보일지는 영원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그림 속 화면은 우리의 눈으로 보는 세계와는 달리 파란색과 검정색, 두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정경진 작가의 화면은 사실을 담고 있다. 우리의 시지각도 사실 파란색 렌즈를 낀 것처럼 한정되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보통 마주하는 흰색 종이는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보고 경험한 것들은 이미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얀 종이를 마주한다고 하여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흰 종이 위에 그린 형상이라고 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담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형상 또한 나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한지 위에 아교를 바른 후, 먹과 파란색 안료를 섞어서 화면을 채운다. 더 이상 흰색이 아닌 검정색의 한지 위에서 형상은 그 검정색 화면을 지워 나감으로써 탄생한다. 이미 안료가 칠해져 있는 검정색 화면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나’라는 정해져 있는 틀에서 세계에 대한 경험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유비와도 같다. 세계에 대한 경험은 이미 칠해져 있는 안료를 지워나가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검은 화면을 물로 지워 나감에 따라 어떤 형상이 나타날지는 작가 본인도 예측할 수 없다. 세상에 대한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경험이 나의 관점에 의존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똑같이 지우더라도 파란색과 검정색 물감의 조합과 아교의 농도, 건조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타난다. 더 흐릿한 형상이 나타날 수도 있고, 더 선명한 파란색이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경험이 내 안에 갇혀있다는 것이 그 경험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삶은 결정된 것들과 우연의 끈끈한 결합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하얀 한지를 한번 검은 색으로 덮음으로써 파란색과 검정색으로 그림의 가능성을 한계 짓는 것과도 같아 보이겠지만 이는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이 모든 과정은 ‘현실을 화폭에 어떻게 담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당신이 보는 세계가 파란 색으로만 채워진 이 화면보다 얼마나 더 다채로운지, 당신이 끼고 있는 렌즈의 색은 어떤 색인지. 어떤 색으로만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계일 수도 있지만, 파란색의 화면이 주는 고유한 신비함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것은 한편으로 축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준영 (서울대학교 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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